[에세이] 캬바레 큐리오시티 - '세균의 미학' 지식, 그 너머

 
 
 
 
‘세균의 미학’
지, 식, 그 너머

김영종(에무 관장)
 
 

1
 
 
나는 내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다른 걸 말한다 해도 내 이야기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가령 좀도둑 얘기를 한다면, 그건 좀도둑에 대한 나의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때론 그걸 팩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지럽다. 사실이란 게 의문투성이요 정체불명이다. 
 
(거울과 카메라. 
이를테면 거울은 상상이고 카메라는 사실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독백하는데 반해, 카메라를 통해서 외부의 물체를 기록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은 ‘측정수단’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따라서 이들은 그 측정수단(기준)에 의해 팩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합의일 뿐 조금도 사실이 아니다. 1미터는 전혀 1미터가 아니다. 
 
이들은 일종의 ‘합의’를 마치 선험적으로 주어진 ‘기준’인 양 교육하며,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그렇게 말할 때, 언제나 나(자기)는 빠져 있으면서 추상적인 공동체(사회나 세상)를 앞세워 무언가를 평가한다. 이때, 측정수단에 의한 기준은 추상적인 공동체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할 뿐이며 각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비유를 상기). 세상은 이들 앞에 ‘평가받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측정수단을 가진 자는 ‘갑’, 그렇지 못한 자는 ‘을’로 서열화한다. 갑은 엘리트, 을은 대중이다.
 
이들은 마침내 자본주의 종교에 불과한 ‘형이상학’(‘진보/발전의 유토피아’)을 보편적인 진리인 양 세례를 주듯 뿌리며 이런 계서화된 엘리트-대중의 ‘신분체계’를 선악의 ‘가치체계’로 교묘하게 전화한다. 학문과 예술이 그 교묘한 문화전략을 맡고 있다. 중세의 성직자처럼.
 
이제 문제는 구충과 아큐다. 
 
누구나 나를 넣어서 세상을 이야기하려 하는 한, 저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포함된 세상을 말하는 순간, 이미 저들의 가치기준과 평가를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멋도 모르고 저들의 이야기를 대신 떠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저들의 평가기준을 거부해야(≑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 나를 집어넣어야)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하려는 자는 저들과의 투쟁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구충’과 ‘아큐’는 기생충인 주제에 저들처럼 자기를 빼고 세상을 평가한다. 구충은 내가 쓴 사진소설 <<난곡이야기>> 주인공이고, 아큐는 다 알다시피 노신의 <<아큐정전>> 주인공이다. 
 
둘의 공통점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간, 세력, 흐름 등을 숭배한다는 것. 
무허가 주택에 사는 구충이 보금자리를 허물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한 것처럼.
 
 

2
 
 
측정수단을 가진자들의 ‘형이상학’은 
기생충 인간을 일단 박멸 대상으로 간주한다. 
 
문제는 저들의 ‘형이상학’이다.
학문과 예술이 그것을 치장한다.
 
이것저것 아는 것은 ‘지’다.
그것도 모르냐, 할 때 대상의 정보적 지식과 관련해서 무지를 쓴다.
지는 양적 개념이다.
 
식별하는 것은 ‘식’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식한 놈이라 한다.
식은 질적 개념이다.
 
대체로, 세상은 무지한 자를 기생충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무식한 자는 저들이다. 
 
기생충들이 무지하나 무식하지 않은 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물을 줄 때와 받을 때, 술값을 낼 때와 얻어먹을 때와같이 줄 것과 받을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정도의 ‘경우’, 즉 ‘식’이 있다. 
가장 간단한 이 ‘구별’(경우, 식)이 흩트러지고 혼탁해지니까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쉽게 말해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받아 먹기만 하는 자가 사실은 기생충이다. 대접만 받으려는 자, 존경만 받으려는 자, 숭배만 받으려는 자……. 
(받아먹기→ 대접→ 존경→ 숭배 순으로 기생충의 성질이 진화하는데, 그 기초에는 ‘받아만 먹기’라는 생활 경제가 가로놓여 있다.)
 
이자들은 ‘지’를 앞세워 ‘자기들한테 바치는 자들’을 무지한 자 즉, ‘기생충’으로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식별력이 없는 경우다. 앞뒤가 뒤바뀌는 전도현상이 무식한 이자들의 특징이다. 즉, 똥을 된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다지무식’하다고 말한다. 많이는 알되 경우를 아는 ‘식’이 없기 때문이다. 
졸부에 해당하는 졸지다. 
졸부가 돈을 앞세워 세상을 희롱하듯, 졸지는 지를 앞세워 세상을 농락한다.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도시킨다. 
지금 세상은 전도된 세상이다.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 전도를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걸 의미한다. 
 
 

3
 
 
나, 김영종에 대해 알아보자. 난, 일하는 분야로 보면 잡상인이고, 직무로 보면 전대수다. 전대수는 내가 만든 조어 ‘전문가로부터 대중을 지키는 사람’의 약칭이다.  
 
프랑스혁명도 봉건 사상의 전문가인 승려계급한테서 농민 등을 지키는 근대사상의 횃불이 타오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그 횃불의 불씨가 된 게 ‘에라스무스’다. 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거두로, <<우신예찬>>이 대표 저작이다. 내가 그걸 흉내내 쓴 게 <<헤이, 바보예찬>>이다.
 
요즘과 다르게 당시 인문주의는 ‘전도의 되돌림’을 위한 운동이었다. 승려의 입 안에 있는 신을 신의 입 안에 있는 승려로 원위치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이를 위해서 에라스무스는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승려 특히, 현자라고 존경을 받는 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현자의 반대는 바보다. 그가 바보여신(우신)을 찬양하는 것은 우화도 은유도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노래인 것이며 망치를 들고 철학하기인 것이다.
 
지와 식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소싯적에 ‘패션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세계 최고 패션디자이너가 은퇴무대를 가졌는데, 모델들이 나체로 등장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맨몸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패션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지, 식, 그 너머에 맨몸이 있다. 무지, 무식, 그 너머에 분별하지 않는 경지. 즉, 바보다. 에라스무스의 바보여신(우신)은 ‘전도된 현자’를 바로 세웠을 때 나타나는 ‘진정한 현자’다. 그 우신은 봉건의 사상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나타났다.
 
현대에도 사태는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의 ‘형이상학(물신숭배가 대표적)’은 현대인의 사상굴레다. 그 형이상학을 생산하는 지식의 공장.
구체적으로,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신분’으로 작용한다. 현대에 신분 타파가 어려운 것은 학벌, 지식을 신분으로 인식하지 않고, 현자(엘리트)의 능력이나 덕목으로 공인하기 때문이다. 봉건의 승려계급처럼. 
 
지식은 ‘근거’를 제공한다.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은 유언비어가 된다. 기생충이 된다. 
지식자(엘리트)들의 룰이 강요되고 그들의 즐거운 게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소설 <웃는 남자>에서 귀족들의 낙원은 인민들의 지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귀족(엘리트)들의 이 즐거운 낙원(게임)에 정당성(룰)을 부여하는 자들이 저 지식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의 금과옥조인 ‘근거’는 기본적으로 허구다. 그 허구를 깨닫는 게 ‘식’이다. 결국 식은 ‘空’을 지향하게 된다. 
 
근현대 문명은 건축에 비유된다. 건축은 땅을 근거로 삼는데, 지구는 공중에 떠있다. 더구나 지구는 우연히 생긴 것일 뿐더러 달과 태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지구 중심주의를 벗어나면 우주의 공허(空)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근대학문은 그 근거, 그 토대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4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산소가 있어서 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질소 때문에 살고 있다. 대기중에 질소가 약 78프로를 차지하고 있다. 질소는 생물의 필수 원소이다. 질소는 동물에서 생산되는데, 우리 몸에서 질소를 생산하는 동물은 박테리아를 비롯한 균이다.
 
나는 '세균의 미학'을 주창한다. 구충과 아큐도 균이다. 사회에서 이들은 계몽, 축출, 박멸 대상이다. 
 
사회적 약자는 균이다. 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사회가 존립할 수 없으므로 사실은 최강자다. 여기서도 전도되었다. 최강자가 약자로.
이 전도를 다시 혁명하는 예술이 ‘세균의 미학’이고 그 요체는 ‘세속화’다. 
세균의 미학은 지식에 차폐된 예술에 도전장을 던진다. 
‘지식의 바깥에서 성채를 향해.’ 
 
 
 
 
김영종
 
에무 복합문화공간 대표
 
저서  <난곡이야기>, <헤이, 바보예찬>, <너희들의 유토피아>. <티벳에서 온 편지>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빛의 바다1,2> (소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그리고 김일성 만세> (소설)
역서  <실크로드의 악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