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봄비 내리는 날, 그곳



방사능 봄비와 자연의 봄비 사이에서 ‘촉감의 미학’을 보다.
-김영종 (관장,저술가)
 
 
방사능 봄비가 전국을 적신 다음날, 이현주 작가는 경희궁 기슭에 자리한 지하 공간 ‘에무’에서 <봄비 내리는 날, 그곳>을 전시했다. 오픈닝에 온 관람객들은 공간에서 봄비를 맞고 있었다. 인공으로 봄비를 만들어 뿌려대는 것도 아닌데 틀림없이 새싹을 피워올리는 봄비는 ‘그곳’에 아름답게 그리고 포근히 피부를 적시고 있었다. 표현의 문제였던 것이다. 

작가가 연출한 공간은 속삭임으로 가득하다. 커다란 빗방울들은 큰 나팔꽃을 찾아가는 나비의 소리까지 들려준다. 

빨강, 녹색, 노랑, 주황, 분홍의 꽃님이들이 자기 키만한 비를 맞으며 숲속을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린다. 꽃님이들이 손에 든 꽃은 누구에게 주려는 선물일까? 나? 섬세한 관람객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환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작가는 말한다. “땅에 떨어지는 빗물은 땅 위로 올라올 어느 생명이 받는 선물이고, 꽃님이가 든 꽃은 아직 온기를 준비하는 누군가가 받을 선물입니다. 봄비와 꽃은 여기 모두에게 선물입니다.” 

비가 오는 데도 푸른 하늘이 마술처럼 펼쳐지고 땅에선 도토리 삼형제가 오리 아줌마와 인사를 나눈다. 구름 셋은 이 연극의 코러스가 되어 주인공들의 일상적 대화를 자연의 무한으로까지 확장하는데, 이는 이미 도토리 삼형제가 두더지 아저씨의 전갈을 받고 도토리나무에서 뛰어내리려는 장면이 마련됨으로써 그 확장이 명확한 근거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도토리 삼형제의 움직임과 마주하며 ‘설레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편, 이에 호응하기라도 하려는 듯 땅바닥의 풀들과 민들레마저 ‘설레는 소리’에 합창하는 느낌을 받는다. 

하늘을 비상하는 황조롱이, 엄청나게 큰 녹색의 꽃, 환상의 탈것을 타고 공중으로 여행하는 신기한 캐릭터들, 환상의 동물들······ 이들 역시 봄비 없이는 도토리 삼형제와 한 공간에서 화합하기 어렵다. 맑은 하늘과 비오는 숲속은 자연의 모든 움직임 그리고 모든 소리를 하나의 미장센 즉, 하나의 장면으로 붙여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의 무한은 소기의 목적을 향해 펼쳐진다. 

이(소기의 목적)와 관련해 작가는 동영상을 하나 준비했는데, 이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생명으로 춤추는 아이들이 그것이다. 



나는 이현주의 전시를 소리를 매개로 한 촉감의 미학으로 대한다. 포르릉, 재잘재잘, 꿈틀꿈틀, 아옹다옹, 뚝뚝, 철벙철벙, 부스럭부스럭, 하하, 간질간질·······. 작품 속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을 들으려면 우리는 촉각을 섬세하게 곤두세워야 한다. 그러면 소리들과 함께 만져지는 것을— 무한히 다양한 촉감을 체험할 것이다. 



이러한 촉감의 미학은 ‘표현’의 전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의미’의 전시로는 조금도 촉감을 느낄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자. 



작가: 제 작품은 동화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화가 아니에요. 

필자: 그렇게 보입니다.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그래서 우주적(자연적)인 것 같아요. 같은 얘긴데 작품이 작가의 자아에서 나오지 않은 게 느껴져요. 



이번 전시를 보면 동심도 자극하지 않고 향수도 자극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들이 의미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는 반드시 기호를 통해서 전달된다. 바꿔 말하면, 기호는 의미를 지시한다. 의미를 내재한 작품은 기호로 읽힐 수밖에 없다. 

기호는 ‘상상의 해석’을 요청한다. 그것(상상의 해석)은 자연의 대상화요 분절이요 훼손이다. 이성의 주도하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작품은 이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상상의 해석’은 자유를 요청한다. 기존의 선악이나 참, 거짓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는 예술가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가 의미와 관련되는 한 전혀 자유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표현’과 ‘의미’를 차별하려 할 때 자유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피노자가 일찍이 증명했듯이 의미와 관련된 자유는 상상물에 불과한 허상이다. 오직 자연에서 오는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다. 이 자유야말로 선악이나 참, 거짓을 넘어선 예술적 자유의 지평이다. 



앞서 작가의 말로 돌아가자. 동화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화가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 ‘자연에서 오는 자유’에 대한 정확한 접근이다. 

동화는 원래 메르헨의 번역어로 전설, 신화, 기적 등이 일어나는 ‘환상 이야기’를 말한다. 동화가 어린아이들의 세계만을 그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메르헨이야말로 자연을 어떤 무엇으로도 분할하지 않는 대표적인 장르다. 

메르헨 즉, 환상 이야기만큼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출도 없을 터인데, 여기서의 상상력은 이성의 힘이 아닌 자연에서 오는, 다시 말해서 자연의 연장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메르헨을 자연언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메르헨의 상상력은 필연적인 만큼 ‘자유 없음’이면서 동시에 그 필연성이 자연에서 오기 때문에 ‘무한한 자유’의 소산이다(막스 뤼티). 이에 반해 ‘의미를 일으키는 상상력’은 (자유의 원인을 모른 데서 오는) 유한하고 허구적인 자유의 소산으로서 반드시 이익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거듭 말하거니와 자연을 분할하고 대상화하고 훼손한다. 

이현주가 동심에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분할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연장의 속성이 부단히 감지된다. 관람자 중에 의료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작품에 대해 “친숙하면서도 새롭다”고 말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만약 이현주 작가가 동심에 국한된 작품을 했다면 작품의 새로움은 촉감이 아닌 의미/기호로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은 ‘동심’이나 ‘향수’를 한층 더 능란하게 자극할지라도(그래서 이익이 될지는 몰라도) ‘생명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의미/기호는 명백한 지시(기존의 규범적 가치, 교육적 오락적 가치 따위)를 신비화하는 데 따르는 ‘다의적인 합성물’의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인식의 미학이며 당연한 귀결로서 지적 허영심과 시장의 욕망을 채워주는 데 기여한다. 



글머리에 말한 것처럼 어떤 인공의 힘도 빌리지 않고 지하공간에서 그의 작품이 생명의 봄비를 내린 것은 바로 이러한 ‘표현’ 때문이었다. 


김영종(관장,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