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문의 집



최재용 초대전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2015.06.02 ~ 06.28
*작가 : 사진가 최재용
*전시오프닝 : 6.6(토) 오후 2시
*전시 주관 : ‘정조문의 항아리’영화추진위원회 / (사)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
*전시 후원 :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 국립박물관문화재단 / 복합문화공간 에무 / 사계절 출판사 / AGI Society /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 HUKS MUSIC / (주)인디플러그 / (사)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센터 /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 (주)카티정보
*전시 협찬 :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 ㈜카티정보 / 플랫폼_아트마케팅 프로젝트그룹


*전시 기간 부대 행사 :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 제작과정과 의의 (현장 예매: 유료 5,000원)
: 에무 2층 Emulsion Cinema / 9일: 작가(최광희 평론가) / 16일: 감독(황철민 세종대교수) / 23일: 제작자(최선일 미술사학자)

 


– 기획 의도 및 취지

조선 문화재 수집가인 재일교포 정조문(1918~1989).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출신으로 1924년 6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갖은 고생 끝에 파칭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조선 백자를 구입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 시바 료타로,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같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며, 도처에 산재해 있는 조선의 귀중한 유물들 약 1,700여점을 수집해, 일본의 古都인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척박한 일본 땅에서 집념과 의지 하나 만으로 조선의 얼을 지켜내고자 했던 재일교포 정조문의 삶을 추적하고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여 만인 2013년 초, 미술사학자인 최선일 박사의 주도로 황철민 감독(세종대학교 영화학과 교수)와 최광희 영화 평론가가 뜻을 모아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를 제작했고,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조금씩 정조문과 그가 일본에 남긴 소중한 유산인 <고려미술관>을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년, 한일수교 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 특히 최근 들어서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 해외의 우리문화재환수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고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현재 <고려미술관>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으로 인해 특별전과 교육프로그램 등 기존활동을 접어야할 상황에 처해 있다.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한국과 일본의 숱한 박물관에 비하면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정조문의 <고려미술관>은 초라해 보일런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반드시 지켜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진전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은 전 재산을 털어 일본으로 유출된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는 데 일생을 바친 정조문의 흔적을 사진가의 시각을 통해 기록하고, 고려미술관의 가치와 그 존재를 우리 사회에 보다 널리 알리고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특별히 기획되었으며 지난 2014년 4월과 10월,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의 추진위원인 사진가 최재용이 교토를 방문해서 정조문의 유산인 <고려미술관> 곳곳을 돌아보며 담장, 작은 돌, 크고 작은 나무, 수많은 항아리들과 석상들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땀과 눈물, 의지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간송미술관의 화려한 컬렉션에 모두가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반해 일본 강점기에 차별과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한국의 유물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정조문의 노력은 우리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와 사진전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을 계기로 문화재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정조문의 숭고한 뜻과 업적, 그리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작가노트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1989년 2월,
한 청년이 일본 교토의 이곳 저곳을 한가로이 배회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그 근방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한 재일교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지만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청년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당시 한국에서 그 교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아니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5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작년 이맘 때 쯤이다. 재일교포로서 파친코 사업으로 번 돈을 일본 내 조선 유물들을 끌어 모으는데 바쳤던 사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끝내 조국땅을 밟지 못했던, 아니 밟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정조문이라고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추진위원회에서 자발적 후원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가 눈을 감던 날 교토를 배회하던 청년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오랜 빚을 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나에게 받을게 없는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봄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4월,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의 추진위원들과 함께 벚꽃이 흐드러진 교토로 갔다.

담장의 울퉁불퉁한 돌덩이에, 수줍게 얼굴을 가린 석상에, 마당의 한 뭉텅이 이끼에
그가 있었다.

그를 모시고 왔다.
25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