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로서의 색채
2013.06.07 ~ 06.30
 

 

작가노트

 

서울과 브라운슈바익(Braunschweig), 두 문화 예술의 다른 공간에서 교육받은 나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독일 유학시 꾸준히 “물(Water)”이라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와 불안의 감정을 표현했다면, 귀국 이후 서울에서의 삶의 변화는 또 다른 장소의 이동과 함께 새로운 작업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 실험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매우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개발하고 있다. 주변의 자연환경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관찰하고, 현실에서의 나의 경험, 기억을 결합한다. 직접 찍은 사진 이미지, 혹은 미디어나 SNS를 통해 추출된 이미지를 기억, 저장한 후 여러 개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 위에서 고찰하고, 수평적 레이어로 추상화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자연은 나에게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보였고 끊임없는 변화는 무궁한 색채를 선사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가을,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겪고 난 후 나는 말을 잃었다.

침묵했다.

언어화되지 못한 말들이 의식 속에서 부유했다. 그리고 색을 느끼지 못했다.

일시적이며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잊혀지는 감정들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다시 붓을 들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고 시점은 내면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예기치 못한 일상의 단절에서 느꼈던 그 감정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15분 단위의 시간과 색감정을 연결해 감정을 색채화하는 일련의 조색(mixing colors) 과정을 연작으로 표현한 ‘형용사로서의 색채’와 그것을 단서로 한 ‘큰 그림’을 작업하고 있다. 전시되는 그림에 명사적 색채는 없다. 마치 색으로 이야기하듯, 완성되지 않은 독백과도 같은 이 그림들은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지시하지 않는, 순수한 감성 자체를 드러내는 형용사로서의 색채로 관람객에 의해 완성되어 속삭이듯 조용한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감성으로서 지금까지의 작업보다 더욱 심화된 감성과 그것을 분석적으로 표현한 이 작업들로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들의 절망적인 고독을 넘어서기를 나는 기대한다.

 

2013 이 경
 

 



 

작품설명

 

형용사로서의색채:

 

색채를 만드는 데 있어 일반적인 접근방식인-물리학적, 화학적, 심리학적, 생리학적, 미학적 접근법을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겠지만, 총체적 접근방식으로서의 주관적 접근으로 색채를 조색하고, 언어로서의 형용사적 의미를 수립하여 적용, 마지막으로 직관적인 감각에 의해 색채 팔레트를 만들었다.

지시받는 사물이나 존재, 명사는 배제하고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다. 그리고 잊혀지거나 소멸한 감정이나 심리상태는 제거한다. 몇 개의 단어를 시작으로 감정을 색채로 치환하기 위해 보드 위에 색채를 맞춰보면서 빠르게는 이삼일, 혹은 몇 주씩 걸려 조색하고, 기록하고, 선택한다. 색감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한다. 드로잉은 매 순간 변화하는 그것을 1/4시간 단위로 기록한다. 서로 다른 드로잉 또는 한 드로잉에서 같은 시간인 것은 며칠, 혹은 몇 주의 차이가 있는 시간이다. 어제 선택한 색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질 수 있고 감정과 심리의 농도에 따라 색채도 변화하지만, 여러 날에 걸쳐 혼색된 색은 형용사적 개념으로서의 색채로 명명될 때까지 변화를 거듭한다.

보드 위에 기록된 색채의 덩어리들은 각각의 고유한 색 언어를 표현함과 동시에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 감정들이 한 사람의 개인에게서조차 얼마나 다양한 색채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택된 색채는 캔버스 위에 양각으로 보이는 형용사 문자와 함께 단색으로 처리했다. 두께가 보일 듯 말 듯한 정도의 양각으로 레이저 컷팅된 문자를 색채가 완벽히 칠해진 캔버스 위에 접착한 후 다시 덮일 만큼의 물감을 반복해서 칠한다. 완전히 건조한 후 떼어내면 양각으로 형성된 문자가 얇은 그림자에 의해 구분되는 형용사이다. 완전히 제거된 이미지 자리에 속삭이듯 형용사 단어인 텍스트가 자리를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