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전

 

바보전
2015.10.30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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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 안에도 바보가 있음을 압니다.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현대는 사회와 개인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그 음지 속에서 신음하는 ‘원초적 존재’가 바보일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에 공통된 '바보'의 존재는 예술로 표현될 때 영원성을 획득하는 ‘시대의 초상’으로 읽힐 것입니다.

 

복합문화공간에무 갤러리의 2015년 주제는 ‘바보’입니다.

 

‘나’는 자연과 함께하는 존재 이전에 자연 그 자체입니다. 내 안의 바보는 이성(혹은 자아)에 유폐된 나의 자연입니다. 나는 문명을 좆으면서 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분열적 존재입니다. 정신병 증상입니다. 자신 안에 흙(바보)을 모두 포장도로로 덮어버릴 것을 목표로 미개인들을 보면서 나는 개발되었다고 으시댑니다.

내가 자연이란 사실을 거부할 때, 나는 고유한 내가 될 수 없습니다. 대중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익명의 사람들은 사실 고유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보다 번호로 증명되는 세상이고, 심지어는 번호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하는 추세입니다. 익명 속에 숨고 싶어 하며, 개별의 특별함이 지워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어떤 꽃에 이름을 붙여주고 예뻐하면 꽃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이게 생명의 본모습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생명을 외면할 때, 그 존재는 그저 꽃이라든가, 새라든가, 돌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하는 전체에 속한 개체일 뿐입니다. 

‘그’를 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회, 그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아름답게 꽃필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거세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바보가 압살당하고  있는 반증입니다. sns는 주로 그런 아우성의 집합소입니다.

일반성 속에 묻힌 개인은 필연적으로 숫자화됩니다. 숫자화 된 인간은 화폐로 가격이 결정됩 니다. 진·선·미를 탐구해야 할 지식도 점수라는 숫자로 치환되었습니다. 지식정보사회에선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지식의 대척점에 있는 바보를 학대합니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숫자화 될 수 없는 게 생명입니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교환 불가능한 것을 교환하려는 게 ‘화폐권력’이고, 그에 질식해 있는 게 ‘바보’입니다. 

선악의 피안에 있는 바보는 ‘불성’이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입니다.

지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바보. 그러나 지력의 근원적인 힘은 바보에서 나옵니다. 새가 날 수 있는 능력이 지력에서 나오지 않듯이 인간의 사회생활을 하는 능력도 지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공감능력에서 나옵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차별을 넘어서려는 데서 움직이므로 바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기획에 12인의 화가가 참여합니다. 

 

동양화가 : 강경구·김보희·김선두·유근택·이동환·정종미 

서양화가 : 강석호·공성훈·서용선·정정엽·홍범·황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