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낭만짓기

 

 

‘낭만’과 ‘짓다’의 사이
 

2015년 복합문화공간 에무 전시공모 당선작─ 박종찬의 〈낭만 짓기〉



 

공간에 전시된 ‘건축물 텍스트’들은 일관되게 토대가 없다. 박종찬 작가의 ‘낭만’은 여기에서 발견된다. 즉, ‘건축의 이데아’를 부정하는 유희인 것이다. 이데아는 이념인데, 이는 가상이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실재(real)도 아니고 상징(symbolic)도 아니고 상상(imaginary)이다. 이데아라는 상상의 산물을 ‘물자체’(thing-in-itself)가 아니라 ‘상상’으로 취급하려는 태도가 ‘토대 없에기’에 투영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건축물을 해체한다.

 

작가는 전시공모 제안서에서 “길치에게도 길이 있다…….”는 모작가의 글을 인용해 스스로를 ‘길치’에 비유했다. 헤매도 그가 가는 길이 그의 길이며 거기엔 모종의 평등(다른 현실)이 존재한다고 전시작가의 비전을 밝혔다. 이 비전을 그는 낭만/이상이라고 표명했다.

 

‘길치’인 작가에게 ‘길’은 은유다. 그 점에서 전시물인 건축물텍스트와 일맥상통한데, 토대를 없엠으로써 은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은유일까?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실은 독자적인 존재보다 매뉴얼화된 대체가능한 존재들이 되길 원한다.(a) …… 메뉴얼대로 수행할 수 없는 사물(공구),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것, 우열의 관계를 뒤섞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b)” 여기서 ‘매뉴얼화 된 현실(a)’의 거부가 토대 없에기나 해체를 통한 ‘은유(b)’를 생산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낭만 짓기’를 ‘Romantic Build’라고 말함으로써, 즉 낭만을 꾸밈말로 사용함으로써 ‘의식과 작업의 분열’을 스스로 드러낸다. 이는 작가와의 대화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확실하다. 뒤에 밝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의식에서처럼 낭만이 ‘건축’을 형용하는 말이 되면 이항대립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꿈이나 추억, 향수, 따뜻함 따위가 자리잡는다. 그러나 전시 작품 어디에도 이러한 감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낭만이 명사로 쓰일 때 ‘낭만’과 ‘짓기’는 대립하는 이항이 된다. 이때의 명사 ‘낭만’은 ‘짓기’(이성=이데아=메뉴얼)에 대항하는 감성이다. 이 감성의 극단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기관없는 신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은 짓기라는 제작의 미학에 대립하는 형성의 미학에 속한다. 제작이 ‘개념’을 지향한다면 형성은 ‘관념’을 선호한다.

 

작가의 길찾기는 관념적이다. 뚜렷한 paradeigma(이데아를 실현할 본本)를 거부하는 길치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식과 작업’이 분열돼 있는 것도 어찌 보면 형성의 미학을 제작의 미학인 ‘paradeigma/concept’로 변질시키지 않을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형성적 관점은 자신의 작품들을 텍스트로 간주할 뿐 아니라, 에무 전시공간을 또하나의 텍스트로 마주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 결과 작가는 전시방식에서 상호텍스트성을 실현하고 있다. 간단히 두 가지 예를 든다. 이미지 〈구영 3길 81〉은 원래 ‘아래로 향한 지붕’을 위로 올라가게 바로 세워 지붕 두 개가 겹쳐지게 변경함으로써 텍스트들의 관계성을 재창출했다. 다른 하나는 이전 제목 〈이상한 중력〉을 〈한때 군산에서 제일 높은 아파트〉로 바꾼 것이다. 이는 맞은편 귀퉁이에 있는 조형물과 제목을 동일하게 변경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 중요한 것은 ‘이상한 중력’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고 변경된 제목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점이다. 이 작품의 이미지는 ‘아파트’가 하나의 시소처럼 상징화돼 있다. 시소는 비대칭의 운동기구를 대표하는데, 형성의 미학은 비대칭의 관계 속에서만 운동한다. 박종찬은 관념적으로 비대칭의 이상한 중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길치인 그의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사물들의 고정관념을 흔들고자 한 것은 공구 시리즈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의 말처럼 남성적인 이미지로 고정된 공구를 바느질과 꽃무늬 천을 사용해 재현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건축물텍스트만큼 표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관념의 배회가 보이지 않고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든 작품에는 그 세계의 바깥이 있다. 바깥은 타자다. 타자와의 소통이 예술에서 더없이 필요하다. 이 타자는, 좁혀 말하면, 다양한 관람객들과 에무공간이란 컨텍스트이다. 에무공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전시관의 작품을 관람하는 만큼 에무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래에 간략히 소개한다.



 

복합문화공간 에무 관장 김영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