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림책 세계와 민담의 세계


우주의 본성에 귀 기울이는 화가 


‘움직이는 세계’만이 우주의 진리다. 천체와 지상의 모든 것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은 듯 보이는 바위도 그 안에서는 무한히 많은 원자들이 쉴 새 없이 운동하고 있다. 

김용철은 최근의 저서 <우렁각시>의 원화, 그리고 <젊어지는 샘물>, <구렁덩덩 신선비>의 신작을 [그림책 언어와 민담의 세계]란 제목으로 이번에 전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진정 ‘움직이는 세계’의 표현이다. 

‘자연언어’인 민담을 그림책의 형식에 줄기차게 담아온 김용철이 다시금 신작을 통해 그 언어를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선보인 데서 우리는 ‘표현’에 대한 심원한 탐구와 기존 예술이 사용한 ‘우월성의 언어’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발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철을 인간중심주의에 반하는 반휴머니스트 작가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인 민담을 오늘날에 와서는 근대적 관점인 휴머니즘에서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짓보다 더 민담을 곡해하고 훼손하는 것은 없다. 민담은 결코 ‘인간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독 민담이 어린이 세계에서만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한테 독서 지도란 이름으로 어른들의 시선이 은연중 주입된다면, 이를테면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뱀-신랑보다 인간-딸을 우위에 놓고 보게 된다면, 민담의 세계는 완전히 전도된 가치, 잘못된 가치를 전파하고 만다. 민담은 ‘우월성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동질성의 언어’ 즉, 만물이 동질하므로 변형이 자유자재한 세계의 언어— 자연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는 반휴머니즘의 관점을 갖지 않고서는 포착이 불가능한 일이다. 

김용철은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주역의 괘를 빌려와 민담의 세계를 담아냈는데 이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젊어지는 샘물>에서 형식을 이루는 괘를 보면, 위의 셋( )은 연못을, 아래 셋( )은 우레를 뜻한다. 못 속에 우레가 움직이는 의미다. 움직이는 우레를 따라서 못의 물이 출렁거리며 기쁘게 따른다(대산 김석진). 기뻐하며 움직이고 움직이며 기뻐하는 이 괘를 통해 화가는 우리가 텍스트에서 잘못 읽는 선악의 차별을 철저히 무화시켜 민담의 선악이 결코 죄와 처벌에 있지 않고 개선과 권고에 있을 뿐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나아가, 더 근원적으로는 자연의 원천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 하나같이 기쁨임을 생동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민담의 정신에 충실하지 않고서는, 바꿔 말해서 선악이 ‘인간중심주의’에서 생겨났다는 반성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구렁덩덩 신선비>을 담은 괘는 위의 셋( )이 산을, 아래 셋( )이 우레를 뜻한다. 산 아래서 우레가 치니 숲에서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 땅속(지하세계)에서 생명의 불길이 생기는 걸 의미한다. 서양신화 프시케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민담은 김용철의 손을 통해 여태껏 보지 못한 우주적 회화로 진전한다. 이는 서양의 프시케 그림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그러나 위의 두 작품을 감상하는 데 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점은 김용철이 괘를 가지고 의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표현적으로 접근했음을 반증한다. 화가가 괘의 의미를 넘어 괘가 왜 발생했는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초에 괘는 점치는 언어였다.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가 점치는 문자이고 보면 괘 또한 갑골문자와 같은 유(類)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문자(한자)가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로 전락한 대신, 괘는 여전히 우주적 변화를 담지한 결과 동아시아문화권에서 괘(주역)가 최고의 지식으로 간주되어왔다는 사실이다. 

괘는 인간사회를 포함한 삼라만상을, 글머리에서 말한 ‘움직이는 세계’로서 파악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언어체계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알타이어의 본질이기도 하다. 알타이어만이 술어(동사)—‘움직임’—가 문장의 중심인 반면, 유러피언 언어는 명사가 문장의 중심이다. 

움직임/술어적 관점과 관련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원에 대한 정의의 하나는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인데, 이 정의에는 움직임(술어적 관점)이 없다. 반면, 원을 한쪽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움직이는 모든 직선에 의해서 그려지는 도형으로 정의하면 여기에는 움직임이 들어있다. 

김용철의 두 세계— 그림책과 새로운 회화—는 이러한 움직임/술어적 관점에 따른 결실이다. 장르를 분절적으로만 보는 의미/개념 위주의 미학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획기적 성과라 할 것이다. 이는 작가가 그림책의 본질적 속성인 ‘움직이는 세계’를 지속적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아주 자연스러운 만남이다. 

관장 김영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