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복합문화공간에무 공모선정작 전시 《빔》 권희수 2020.11.04 - 2020.11.21


l 전시서문


 
비인 빈 빔
- 텅 빈 치밀함

 


눈과 사물의 경계: 순수 시각-장
하나의 시각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표면의 형태와 색깔, 질감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주의를 기울이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옅은 아이보리 바탕에 조금 더 짙은 갈색의 나무결이 독특한 무늬를 형성하고 있다. 색과 형태들 속으로 눈이 계속 파고든다. 딱딱하게만 보였던 책상이 새삼 흐물거리면서 내 눈을 아득하게 만든다. 내가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책상은 계속 물컹하게 변한다. 나는 책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책상의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사물 하나를 보는 이 활동 속에서, 줄곧 확고하다고 여겨지던 ‘나’의 위치도 문득 희미하게 느껴진다. ‘나’는 없고, 다만 ‘보기’만이 남을 뿐인가. 
나와 책상 사이를 연결하는 이 ‘보기’ 운동에서 책상은 그저 빛과 색의 운동으로 존재할 뿐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 역시 사물 표면에서 일어나는 빛과 색의 운동에 혼합되는 과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책상과 나의 경계란 사실 그리 명확하지 않다. 보여지는 사물과 보는 눈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연결된 채로 작동하는 관계항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경계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양자의 경계는 순수 ‘시각-장場’이란 말로 전환되어야 한다. 시각-장 내에서 사물과 눈은 서로에게 스며든다. 양자의 상호습합 속에 결국 남는 것은 빛의 운동이다. 
나로서는 이제 무엇인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과연 책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가, 도대체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있는가? 순수 시각-장 속에서 책상과 내가 항구적으로 점유하는 영토란 없다. 점유와 소유의 폐쇄적 활동이 사라진 곳에는 개방적 운동만이 남는다. 시각-장의 개방성, 열림, 여하한 경계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텅 비었다. 어떤 닫아거는 활동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이곳은 너무도 ‘촘촘하게 텅 비어’ 있다. 무언가가 세상에 없지 않고 존재한다면 본질적으로 그의 삶은 바로 치밀하게 운동하는 이 텅 빔에서 출발한다.


배경복사반사
권희수 작가의 작업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가상계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운동성이다. 작가의 시선은 개별적인 사물을 나누는 경계의 심연에서 아직 분리가 일어나기 전인 미분적 운동 지점을 발견한다. 실상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그렇게 나눈 개별 사물들을 보편적인 문법 체계에 맞게 안정적으로 배치하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이러한 일들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경제성을 따지는 습관과 그것의 극단적 물화 형태인 자본은 언어를 더욱 기계적으로 운동하도록 한다. 언어마저 자본의 역능에 복속된 상황에서 인간과 사물은 자원 내지 상품이라는 요소로 급격하게 동질화되어 간다. 이제 모든 존재가 상품으로 시장에 등장한다. 개별 사물들은 자본의 크기에 따라 서열과 위계를 지니며 팔려나갈 준비를 한다. 이러한 상황이 좋다고 한다면 더이상 논의할 것도 없다. 조금이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인간과 사물의 본래 자리를 재차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권희수 작가의 이전 작품 <배경복사반사>(2020)는 인간과 사물의 본래적 공통 지반을 형상적 차원에서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통상 인간에게 부여되는 인칭 대명사의 쓰임새에 의문을 던지며 시작된다. 작품에서 작가는 한 인간이 ‘그/그녀’로 칭해지기 전 ‘그것’으로 불릴 수 있는 시간 경험을 소환한다. ‘나’ 혹은 ‘너’ 역시 그렇게 각자의 위치를 갖기 전에는 그저 ‘그것’으로 존재할 따름이었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은 인간을 간단히 물화시켜 버리는 자본의 운동과는 분명히 다르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성은 생성의 시작, 다시 말해 무언가 존재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접근하도록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반투명한 창문과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돌아가는 회전문은 사물 차원의 존재 사건이 지니는 근본 형상을 떠올리도록 한다. 그와 그녀, 나와 너의 경계는 창문의 반투명한 매질 속에서 희미해진다. 경계에서 발견되는 혼연함은 곧 개별 존재의 근본 상태란 끊임 없는 위치 바꾸기이자 그 자체 운동 중인 것임을 보여준다. 나는 나 자신이기 이전에 그 무엇이었다. 비인칭에서 인칭으로의 전격적인 전환, 다시 말해 그 무엇에서 나 자신으로의 탄생을 자유로운 상승 운동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이는 그 반대의 운동, 즉 인칭에서 비인칭으로의 하강 운동에서 우리는 인간 주체성을 내려놓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나/너/그/그녀의 자리를 떠나 사물로 내려가는 이러한 ‘적극적 포기’는 한번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 재차 시도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자유의 행위이다.


 
섬광탄
주체에서 사물로의 하강 운동과 무한한 회전 운동 속에서 인간과 사물의 공통 형상을 발견한 작가는 작품 <섬광탄>(2020)에서 언어와 의미로 향하는 감각 운동의 실상을 보여준다. 언어와 의미로 향한다고 했지만 실상 그것의 완전한 성취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운동은 운동으로서 지속될 따름이라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공연장 천장이 높다. 벽은 온통 검다. 바닥에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인쇄된 종이와 필름들이 흩어져 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로지 빛. 인체는 빛과 함께 운동하고, 그 리듬에 맞춰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수송한다. 수송된 텍스트와 이미지들은 때때로 관객에 의해 재수송되거나 연접되고, 혹은 찢겨 나가기도 한다. 운동은 계속된다. 흩어졌다 모이고 상승하다가도 하강하는 운동은 공연장의 검은 벽을 튕기듯 울리다 마침내 한 자리에 켜켜이 쌓인다. 
<섬광탄>은 감각계 내부의 운동이 일정한 방향성을 지닐 때 일어나는 사건성을 보여준다. 무릇 감각 운동은 결국 우리 일상 차원에서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언어로 정리되겠지만, 그렇게 최종 정리되기까지 감각계 내부는 혼돈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보았던 것은 일정한 메시지와 결합되기도 하지만 결합이 반드시 그런 모습이어야 할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중첩되는가 하면, 전혀 다른 글자들에 달라붙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의 기억 작용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감각과 언어의 결합으로 불려 나온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감각계는 지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앞으로 정위될 이미지와 언어 층위를 가능성의 상태에서 감싸 안고 있다.

 
<섬광탄>의 검은 공간이 이미지와 언어를 지향하는 운동의 가능적 차원을 열어주고 있다면, 이번 전시 <빔>은 방향성을 갖기 이전 운동의 순수 잠재적 차원을 흰 공간 속에서 개방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섬광탄>과 <빔>은 가상계 내부의 운동성을 탐색하는 작가의 작업에서 일정한 연속성을 지닌다. 이때의 연속성은 나란히 놓이는 대칭적 형태가 아니라 운동성 내부로 한 번 더 들어가는 심화 형태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 내부에서 양자가 분리되지 않는 순수 시각-장을 발견한 작가는 그곳에서 두 번의 도약을 – 물론 이 도약은 아래로 내려가는 도약이다. 내려갈수록 보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말 그대로 몸으로 터득한 탁월한 지혜이다 – 감행한다. 첫 번째 도약이 <섬광탄>이라면, 두 번째는 이번 <빔>이다. <섬광탄>은 마치 우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활동과도 같다. 피부는 오랜 기억의 표면이다. 근육은 내가 지나온 과거를 알고 있다. 핏줄은 태고의 모습대로 울컥거리며 피를 실어 나른다. 신경은 피부와 근육과 핏줄을 타고 내장에까지 촉수를 세운다. 눈은 어떠한가. 눈은 가장 깊은 어둠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눈은 무엇인가를 보고자 욕망한다. 욕망은 언제든 무엇 앞에서의 욕망이다. 그것은 대상을 지향하고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운동한다. 무엇인가 대상으로 상정되는 한, 눈은 다시 한번 운동성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빔>에서 우리의 눈은 대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보기’의 순수 운동성, 즉 방향을 설정하기 이전 시각 활동의 잠재적 층위가 경험된다. 보아야만 할 무엇이 없다는 상황은 ‘보기’ 그 자체의 운동을 감지하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보이는 것이 없더라도 우리의 눈은 보느라 분주하다. 우리 시각의 ‘텅 빈 치밀함’이 느껴지는가?
눈을 허공에 널널하게 걸어 두자. 어디 선가 날아 들어온 빛이 ‘적막한 굉음’을 낸다. 살아있다는 증거로 이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임지연(아트노이드178디렉터)
 
 

l 작가노트
 

빛이 부딪친 뒤에 사라지는 순간,
태양이 뜨고 지는 하루의 겹쳐짐 속에서 가장자리 그 경계에서 더 먼 거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멈춰 있는 그것과 다름없는 제자리의 확장된 운동성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한번도 본 적 없는 춤을 그림자의 눈으로 본다
.
창문 너머 고개 돌린 그의 눈동자로

 

빛이 있고 비어 있다

빈 화면이 발산하는 빛, 빛이 그곳에 있다.

 

텅 빈 장면 안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메아리로 부딪쳐 밀려오고 시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돌계단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시야를 가린 담장 틈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는 발걸음들이 보였다.
익명의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빛과 그림자의 일렁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볼 수 없는 장면은 살아있는 빛이 되어 내 몸 안에서 밀려들고 나가길 반복했다. 호흡처럼, 이미지들이 출렁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의 움직임은 고양되었고 한 장의 이미지로 남아 계속해서 빛을 발산했다. 나는 그 빛에 잠시 눈이 멀었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덩어리에 담겨 있는 색처럼. 그러나 숲은 여전히 숲이다. 시야를 가로막는 한 줄기 빛처럼. 시선의 강박에서 벗어나 부딪친 직후,
다시 그 이전으로

 

나는 한 번도 그의 춤을 온전히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가 가장 원했던, 그가 가장 추고 싶었던 춤은 무대 위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은 축소된 현실세계에 있지 않다.

 

미지의 이미지, 이미 지나간 이미지

이 미지의 이미지, 이미 지나간 이미지

 

접촉을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접촉하는 것이다

 

물러서기. 물러서고 기다리기.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기다림을 지속하는 것.
상징과 은유, 형식과 개념의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나 이곳을 가리키는 말들이 썰물로 쓸려나갈 때까지

 

눈은 멀었다
 

 

권희수

 

 


l 전시 정보 
 
전시 제목           
9회 복합문화공간에무 공모선정작 전시 《빔》 
 
전시 작가           
권희수

조명프로그래머   
서가영
전시 기간           
2020년 11월 04일(Wed) - 11 21일(Sat)

관람 시간           
오전 11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전시 장소           
복합문화공간에무 B2 갤러리

퍼포먼스 
매주 금요일마다 사전 예약제로 1:1 관람 퍼포먼스가 이루어집니다.

예약링크 (
https://forms.gle/oi7j2DSLt9ygtk5w8)
2020년 11월 06일(Fri) /2020년 11월 13일(Fri)/ 2020년 11월 20일(Fri)
13:00-14:00/  14:30-15:30/  16:00-17:00/  17:30-18:30

퍼포머 : 김관지, 신채은
스크리닝             
2020년 11월 14일(Sat) 2:30PM              
작가와의 대화     
2020년 11월 14일(Thu) 3PM


비평/멘토   임지연(아트노이드178 디렉터)
진      행    김희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E galleryemu_k@emu.or.kr
                황무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E galleryemu_hmn@emu.or.kr
주최/주관   복합문화공간에무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창작산실 
협      력    사계절출판사, AGI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