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눈





화가의 눈 - 김선두 개인전
2011.12.01 ~ 12.31

작가 : 김선두


 
 




너를 찾아서
 
작년 가을 안개가 짙은 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희뿌연 안개뿐이었다. 서울이 안개도시 무진 같았다. 나는 『무진기행』에 나오는 비유를 떠올리며 장난삼아 마음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오늘 반드시 적군을 물리치리라. 그때 김선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잠시 서울을 뒤덮은 안개에 대해 얘기를 했다. 나는 감성적인 그를 생각해서 안개가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쳐들어온 무진 대신, 김명인의 시구 ‘안개로 단청한 소읍’을 말했다. 그러자 김선두가 말이 많아졌다. 소읍의 알록달록한 지붕들, 오래된 절의 퇴색한 단청처럼 안개에 싸여 채도와 명도가 모두 낮아진 원색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 그는 시간의 흐름까지 말했다. 내가 잠시 잊었었다. 김선두는 역시 시적인(?) 화가였다. 나는 무장을 해제하며 그쯤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렸다.
 
 


 
1. 곧은 선과 굽은 선
 
김선두의 그림에서 선은 대부분 굽어있다. 누구보다 선묘를 중시하는 그는 평소 굽은 선에 대한 편애를 숨기지 않는다.
 
현대 도시의 관계적 삶이 직선적이라면 존재적 삶은 곡선적이다. 직선이 빠름과 능률을 추구하는 선이라면 곡선은 느림과 여유 그리고 살가움을 지향하는 선이다. 곡선은 느리다. 느린 선은 곡선이다. 곡선엔 삶의 넉넉한 여백이 있다. 쫓기듯 사는 삶에는 여유가 없다. 바쁘다는 것은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여유가 있을 때 느릴 수 있다.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야 보다 밀도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다. 밀도 있는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자연속의 형태들은 모두 곡선이다. 직선으로 보이는 것들조차 그 안에 곡선을 담고 있다. 예컨대 직선으로 보이는 지평선도 사실 알고 보면 곡선의 가장 이상적 형태인 원의 일부분이다. 우리나라의 노년기 산 능선이나 유유히 흐르는 강, 그 옆으로 난 길엔 유장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스며있다. 살지지도 않고 수척하지도 않은 꾸밈없는 선들이다. 수수하고 덤덤하지만 졸박하다. 하여 우리 그림은 선이 두드러지며 그 정수는 곡선의 아름다움에 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넉넉한 심성을 닮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다.
 
느린 선의 미학을 통해 우리네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내 그림이다. 나의 그림길엔 항상 느린 선의 꿈과 노래,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함께 할 것이다.
 
김선두에게 직선과 곡선은 빠름과 느림, 도시(타향)와 시골(고향), 문명과 자연 등으로 변주된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남도>, <그리운 잡풀들>, <행>, <느린 풍경>으로 이어지는데, 이 표제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김선두는 곡선을 훨씬 좋아한다. 사실 지금까지 직선과 곡선에 대한 그의 인식은, 지나친 이분화로 의미망이 단순해지고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편 가르기는 사고를 이어가고 풍성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쓰여야지 그것을 넘어서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더욱이 직선과 곡선에 대한 이런 생각은 거의 클리셰(cliché)라 할 수 있을 만큼 낯익다.
 
예컨대 대부분의 경우 직선은 빠름, 내달리기, 상승, 출세로 이어진다. 자신의 뿌리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게 하는 이 과정은 어쩔 수없이 자아상실을 가져온다. 그런데 직선은, 빠른 속도는 정말 그런 끔찍한 가치만 지닐까. 그런 점에서 「너에게로 U턴하다」는 눈여겨 볼만하다.
 
 
 
네거리가 좌회전 깜박이에 한눈팔기 시를 쓰고
 
횡단보도 이어서 느린 보행을 읊을 때
 
 
 
나는
 
너에게로
 
U턴 한다 – 「너에게로 U턴하다」
 
 
 
U턴은 삶을 되접는 행위다. 그것은 삶을 다시 사는 것이다. 그냥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아니 직선으로 빠르게 달려온 궤적을 정확하게 다시 사는 것이다. 그래서 U턴한 삶은 반성적 삶이다. 김선두는 지금까지 자신의 말처럼 ‘직진 차선위의 일벌레’였다. 그런 그가 지금, 이곳을 출발점으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삶이 U턴한 삶이다. 하지만 그가 U턴해서 곡선으로 느리게, 그러니까 큰길 뒤에 숨은 골목길도 걸어보고, 그러다 길도 잃어가면서 그렇게 살까. 아니다. U턴은 직선의 삶이다. 처음과 끝이 뒤바뀐, 나란한 두 곧은 선의 삶. 그는 어쩌면 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왜? 그곳에 ‘너’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달리면 내달릴수록 더욱 크게 나를 덮쳐오던 너.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그래서 완전히 잊은척해도 늘 그대로 내 마음속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너. 그래서 U턴은 「가까운 원경」이다. U턴과 가까운 원경은 김선두가 즐겨 사용하는 역원근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화가에게서 그리려는 무엇(주제)과 그려진 어떻게(형성된 소재)가 이처럼 잘 들어맞기도 어렵다. 멀리 있는 ‘너’가 가장 큰 역원근법의 세상을 만드는 토대는 작가의 말처럼 ‘사랑’이다. U턴해서 가는 길이 옆으로 뒤로 헤맬 수 없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같은 직선이라도 돌아서 가는 직선은 다르다. 그 길은 사랑이 움직여주고 사랑이 끌어주는 길 위의 삶, 「편식」의 외길이기 때문이다.

 



 
2. 사랑 – 살다, 삶, 사람
 
어떤 소설가가 말했듯이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사랑의 뜻은 동사에서만 태어난다. 사랑은 행했을 때만 알 수 있다. 행함과 앎의 순서가 절대로 뒤바뀔 수 없는 가치가 사랑이다. 우리말은 참 아름답고 깊다. 사랑을 살아야 사랑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살다’의 두 명사는 ‘삶’과 ‘사람’이다. 누구도 삶을 살기 전에 미리 알 수 없다. 삶도 사랑처럼 살아냈을 때만 알 수 있다. 그 삶과 사랑 한가운데 사람이 있다. 하지만 삶과 사람을 사랑으로 살아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지만 우선 떠오르는 것이 남녀의 사랑이다. 예술의 변하지 않는 주제가 사랑과 전쟁이라고 하는데, 남녀의 사랑은 그 자체가 전쟁을 속 모습으로 갖고 있다. 쫓고 쫓기고 포로를 잡고 포로가 되고,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는 잘못된 동맹도 맺고, 휴전과 냉전과 종전과 이후 지루하지만 안정된 평화까지, 남녀의 사랑에는 전쟁의 모든 속성이 들어있다.
 
남녀의 사랑에 전쟁의 속 모습만 있지는 않다.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삶의 모든 모습이 그 속에 들어있다. 그래서 「님의 침묵」은 연애시지만 종교적인 구원을 노래한 시이기도 하다. 어쨌든 연애시는 무엇보다 연애시로 읽어야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보다 깊고 넓은 뜻의 확산은 그 다음 일이다. 「술과 술 사이」, 「편식」, 「날씨에 댓글을 달다」, 「너에게로 U턴하다」, 「가까운 원경」, 「흐르겠지요」는 모두 아름다운 연애시다. 그중 「술과 술 사이」를 보자.
 
 
 
살랑거리는 잎 따다
 
술을 담근다
 
잎술 한 모금에
 
흔들리는 오후
 
잎과 잎 술과 술 사이
 
자잘한 소음들 – 「술과 술 사이」에서
 
 
 
‘잎’과 ‘입’의 말놀이가 기본인 이 시는 참 아름답다. 잎은 입이고 잎술은 입술이다. 그러니 잎술은 입술이고 잎술 한 모금은 한 번의 입맞춤이다. 술에 취하듯 달콤한 입맞춤에 취하니 오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흔들리는 잎과 잎 술과 술 사이의 자잘한 소음들은 사랑에 취한 연인들이 입맞춤을 하면서 나누는 밀어(密語)들이다. 이 시는 무엇보다 남녀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노래한 연애시다.
 
 
 
나는 향기를 눈으로 음미하지
 
지난날의 먼 향기까지 -「화가의 눈」
 
 
 
「화가의 눈」과 쌍을 이루는 「가까운 원경」은 공감각을 활용해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을 그린 깔끔한 수작이다.
 
 
 
오늘
 
내 마음속 화폭엔
 
멀리 있는 그대가
 
그리운 향기로
 
더욱 또렷하다 – 「가까운 원경」
 
 
 
「가까운 원경」은 전형적인 모순어법(oxymoron)을 표제로 썼다. 가까운 원경이 가능하다면 굽은 직선과 곧은 곡선, 느린 빠름과 빠른 느림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 극한에 속도의 끝에서 터지는 절정의 순간, 정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싱그러운 폭죽>이다. 봄날 꽃이 만개한 순간처럼 절정의 찰나인 싱그러운 폭죽은 엿보는 순간 사라지는 본질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늘 그 그림자뿐이다. 그래서 싱그러운 폭죽은 찬란함 뒤에 쓸쓸함과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조를 감추고 있다.
 
빠르고 느리다는 시간개념은 상대적이다. 아무리 느려도 ‘~보다’ 빠르다. 상대적 느림은 어쨌든 흘러간다. 하지만 이런 느림(빠름)에 공간이 결합되어 바뀌면 시간은 상대성을 잃는다. 공간화 된 느림은 그 공간 안에서 시간을 끝없이 되접어 다시 살 수 있는 절대적인 느림이다.
 
그렇다면 김선두에게 공간화 된 느림은 도대체 뭘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그에게 고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에게 고향은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공간이다. 아직 어른의 의무를 갖지 않고 자연과 사람들과 사이좋게 어울려 사는 곳, 그 기억과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래서 고향은 공간이되 어린 시절이라는 어떤 절대적 시간을 포함한 특별한 장소가 된다. 이처럼 김선두가 그리는 고향은 그 안에 절대적 느림을 품은 곳으로 지금, 이곳의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 없이는 이 삶을 견디기 어려운 현실속의 이상향이다.
 
공간화 된 느림의 특징은 원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순환과 반복이다. 사랑은 그런 절대적 느림을 가장 많이 만든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영원으로 새겨지는 달콤한 순간은 매우 흔하다. 그들은 틈만 나면 그 시간을 반복해서 다시 산다. 다시 말해 너에게로 U턴한다. 그런데 사랑의 고통이 달콤함보다 덜할까. 행복한 순간만큼 고통스런 순간도 시간이 멈춘 속도의 영도(零度)일 수 있다. 사실 영원으로 새겨지는 순간이 과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역시 밀도 높은 추억과 기억이 될 가능성만으로 절대적 느림이 된다. 누구나 한번쯤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면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기억으로 멈춘 시간, 그 시간을 품은 장소. 그런데 사실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나 빨리 가는지. 다시 한 번 빠른 느림이며 느린 빠름이다.
 
 
 
이 길은
 
앞이 아니라 뒤로 가는 길
 
밖이 아니라 안으로 난 길 -「뒤로 난 길」에서
 
 
 
현실 공간에서 때론 띄엄띄엄, 때론 여럿이 한꺼번에 재생되는 그런 추억과 기억은 일종의 사이버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있지만 있지 않고, 볼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세계로 컴퓨터가 만드는 사이버 공간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의 시간을 담은 장소인 고향 역시 그렇다. 전원이 켜지면 나타나고 전원이 꺼지면 사라지는 세계. 우리의 필요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세계. 결국 절대적 느림에서 결국 시간은 공간화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김선두에게 고향은 현실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 느림이 실현되는 사이버 공간이다.
 
 

 
 
3. 그림길
 
김선두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화가다. 그러니 삶에 대한 그의 모든 생각과 재능은 그림으로 나타나야 한다. 실제로 그의 글은 그림일을 잘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탄탄한 밑바탕일 뿐, 어떤 순간도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예술가는 세계에 대해 자기만의 인식틀을 반드시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생각이나 느낌,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이 이런 고유의 세계관을 다지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주 분명해 보이는 생각이나 감정도 사실은 혼돈 그 자체일 때가 많다. 예술가는 다양한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정신의 흐름에 자신만의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가장 인위적인 행위다. 자연은 위대하다? 자연이 예술의 가장 완전한 모델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좀 멋을 부려 파스칼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이 위대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대체 누가 인식하는가?
 
글쓰기는 생각과 느낌을 구조화하는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변치 않는 굳건한 틀을 지닌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꺾이지 않는 신념이나 의지는 때로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것은 종을 넘어서 다른 존재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품이 넓고 부드럽지만 그 속에 변하지 않는 씨를 품은 세계관이다. 진짜 예술가는 야무진 씨앗 하나를 여러 겉모습으로 부지런히 새롭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작가를 알려면 그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표현양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꼭 살펴봐야 한다.
 
김선두는 그림길 처음에 도시 주변인과 써커스 사람들을 그렸다. 그 길은 <남도>와 <그리운 잡풀들>, <행(行)>과 <싱그러운 폭죽>과 <느린 풍경>으로 이어진다. 써커스 연작에서 김선두는 전통장지기법을 사용해 선과 색을 모두 쌓았다. 그러다 김선두하면 떠오르는 역원근법이 본격적으로 선보인 남도 연작에 오면 전통기법은 수묵장지기법, 농채 등 다양한 실험으로 넓어진다. 그에 따르면 역원근법은 남도라는 땅이 가진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아주 잘 맞는다. 사실 남도 그림을 보다보면 가끔 땅이 벌떡 일어서 보는 사람을 덮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역원근법은 그리운 잡풀들에서 가장 커진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고향땅위에 그 땅보다 더 크게 솟아난 잡풀들은 무엇일까. 게다가 그들은 왜 그리운가. 김선두가 초기에 그린 도시 주변인은 ‘나’의 변형이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남도 끝 장흥에서 서울로 왔다. 그 후 대학 입학까지 김선두가 서울에서 지낸 나날은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난히 긴 팔에 희망의 무지개 우산을 든 써커스 광대는 재수생 시절 김선두처럼 삭발을 했다. 이름 없는 도시 주변인처럼 그 광대 역시 ‘나’다.
 
도시 주변인과 써커스 광대는 관상용 꽃풀들이 아니라 ‘잡풀들’이다. 이런 잡풀들은 도시가 남도로 바뀌면 ‘그리운’ 잡풀들이 된다. 어린 시절 장소인 남도에는 그리운 잡풀(들), 바로 ‘너’가 산다. 도시로 옮겨진 나와 나의 확산인 우리는 주변인이지만, 고향에서 나(우리)는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선두의 그림에서 그리운 잡풀은 점차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존재,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진 나무가 된다. 많은 경우 김선두의 고향풍경에서 나무는 곧 사람이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제각각 움직이거나 서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독특한 나무들이 있는 그림에서 나무에 비해 아주 작은 사람은 군더더기로 보일 때가 있다. 이번에 김선두는 <둥근 쉼표>처럼 사람이 과감히 생략된 그림을 여럿 선보인다.
 
<행>, <싱그러운 폭죽>, <느린 풍경>은 연작 안의 끈이 <남도>나 <그리운 잡풀들>보다 느슨하다. 김선두는 <행>에서 새롭게 오리기 기법을 시도한다. 그동안 중간색을 너무 많이 썼다는 깨달음과 함께 땅의 생명력을 색으로도 드러내고 싶은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을 강한 원색이 차지하자 위에 올리는 잡풀에 농담을 넣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김선두는 약한 마티에르를 보완하려고 고심하던 중 콜라주에 생각이 미쳤다. 콜라주에 대한 생각은, 동양적 콜라주는 무엇이며 현대적 수묵화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져, 마침내 여백의 콜라주와 농담자체의 생략, 오려내기라는 독창적 형식을 낳는다. 묵화를 종이에 그리는 대신 철판에 구멍을 뚫어 표현한 철묵화는 오려내기의 연장이다. 이 과정은 현대적 수묵화에 대한 김선두만의 실험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김선두가 요즘 보여주는 기법상의 변화는, 2005년 달라스에서 머물 때 유화를 자기 나름대로 그려본 경험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번에 김선두는 프레스코화처럼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방식을 활용하기도 하고(<미모사>), 깎아내는(작가의 표현) 기법을 써서 겹치는 색의 효과를 얻기도 하고(<할머니 팥죽에 노래가 있다>), 색을 붓으로 마당을 쓸 듯 칠하기도 하고(<빈들>), 먹선을 그린 뒤 덮기도 한다(<가까운 원경>). 그러다보니 무엇보다 색감이 풍부해지고, 색면을 나누던 선을 불분명하게 하는 새로운 선도 만들어졌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꽤 뚜렷했던 면구분이 선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장식적인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새로운 선은 그런 고민을 어느 정도 풀어준다.
 
지금까지 김선두는 자신의 특장이라 할 수 있는 장지기법에 대해 반성적 숙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생각 한가운데 획이 있다. 색을 여러 겹 쌓아올리는 장지기법은 자칫 획을 약하게 할 수도 있다. 색을 쌓으면서 획이 사는 법은 없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기존 장지기법으로 화면을 만든 뒤 마지막에 획을 더하는 방법과(<여름밤>), 애초 들어있는 획을 살리기 위해 색을 보다 맑게 쓰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고(<아득하다>), 중봉으로 파필의 효과와 깊이를 얻기도 한다(<애기똥풀>).
 
이런 여러 노력에서 보듯 김선두는 동양화의 중심을 선묘로 생각한다.
 
동양 회화에서 선은 상을 취하는 것(取象)이기에 본질적이다. 필선은 색면보다 본질적이다. 색면이 현상이라면 필선은 본질이다. 필선의 요체는 획에 있다. 정신이 충만하여 살아 움직이는 선이 획이다. 고저장단이 내재된 기운생동한 획은 언제나 새롭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색면은 눈에 보이나 필묵의 획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느끼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며 쌓인다. 김선두의 그림에서는 시간의 두 축을 선묘와 색면이 드러낸다. 묵선의 속성을 지닌 그의 선은 시간의 흐름을 매우 효과적으로 가시화한다. 뿐만 아니라 색이 층층이 스미고 번지고 우러나오는 장지화의 면만큼 시간의 쌓임을 잘 나타내는 것도 드물다.
 
거칠고 마른 붓길에 따라 쌓인 색의 겹침과 어긋남 위에 선이 더해질 때, 비로소 색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림은 역동성을 얻는다. 그의 어떤 그림은 보다 맑은데, 그런 그림에서 선은 숫자도 적고 정돈되어 있다.
 
덧칠이 가능한 색면은 고칠 수 있는 가역적인 것이다. 색면이 쌓인 삶에 대한 반성적 생각과 닮았다면, 선은 일회적이고 불가역적인 흘러가는 우리 삶과 닮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선 한줄
 
느리게 가고 있네 – 「지렁이」에서
 
 
 
<느린 풍경>은 고향에 뿌리를 둔 삶과 사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런 화면에서 선은 동력, 근원적 에너지의 흐름, 고칠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의 내달림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선은 ‘살다’라는 동사이며 행동의 현현(顯現)이다.
 
어떤 그림속의 선은 우리 눈길을 따라 그림 밖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그림 밖에서 시작해 그림을 거쳐 다시 그림 밖으로 나가는 선은 안과 밖을 이어줌으로써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시골(고향)과 도시(타향)를 잇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에 보이게 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화폭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선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은 사유로 교정된 정신의 움직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 선들이 없다면 그림은 때로 고인 물 같거나, 아름답지만 정지된 풍경 같을 것이다.
 
선과 색면이 겹쳐진 것이 우리 삶이다. 우리 삶에서 둘을 분명히 나누기는 어렵다. 김선두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상상력이 식물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농촌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농촌이 고향인 사람의 상상력이 식물적이라면 도시출신 사람은 동물적인 상상력을 가졌나? 문득 서울출신 소설가의「식물적 상상력」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상상력은 사람에 따라 특정한 물질적 원소에 치우친다는 이론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상상력은 옳다, 그르다의 가치판단을 넘어서는 정신의 힘이다. 예술은 그 힘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에게는 장르의 구분을 넘어 그 힘이 태어나 잘 자랄 수 있는 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선두는 귀감이 될 만하다. 그의 그림에서는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벼려진 정신이 느껴진다. 이제 우리가 그 그림 속 먼 향기를 눈으로 맛볼 차례다. (이윤옥)
 
 
 
*글 은「」, 그림은 <>로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