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원우 작품소개] 자연에서 마주한 내면의 표정
이호억 / 예술학과 박사 수료

정보람 편집위원  |  boram2009@cau.ac.kr
 
 
 
 


자연에서 마주한 내면의 표정

이호억 / 예술학과 박사 수료


■ 사생수묵(死生水墨)은 작가의 사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2015년 아버지께서 위암 투병을 시작하셨다. 병상에 누워 미동 없이 주무시는 아버지를 보며 다시금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어른의 위태함을 바라보는 무력함에 초연해진 나는, 홀로 논산에 있는 선산에 올랐다. 하염없이 내린 눈으로 산은 순백으로 뒤덮였고 할아버지의 숨결이 담긴 토지지신비문과 나무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비문을 만졌다. 이때 물질로서 뜨겁게 움직이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리된 공간에서 ‘멈춰짐’으로 마주한 경험이었기에, 이 움직임의 근원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지필묵을 들고 무명의 섬과 숲으로 떠나 스스로를 고립 속으로 던졌다. 그동안의 모든 앎과 불만을 전복시켰던 이 경험으로,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생각이 바뀐 만큼 작업의 방식도 바뀌었다. 종전의 작업이 박제되고 위태로운 동물의 형상으로 근대인의 삶을 비추던 방식이었다면, 사생수묵이라는 작업태도의 핵심은 스스로를 인적 없는 이계의 공간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자연에서 마주한 내면의 표정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 사생수묵으로 그려진 <붉은 얼굴> 시리즈는 ‘시선의 변화’에 주목한다

  그간 내 시선이 외부를 봐왔다면, 자연이라는 벽을 거울삼아 외부에서 내면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로 ‘뿌리’와 ‘대지’라는 두 개체의 결합에 주목한다. 대지는 있을 뿐이고 뿌리는 갈구한다. 뿌리는 대지의 형상에 맞춰 자신의 몸을 비틀고 비집어 기어이 처절하게 대지를 움켜쥔다. 이처럼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는 혼자서는 살아가는 것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림은 결국, 우리가 꿈꾸는 완결한 사랑이란 상상의 세계이자 이뤄질 수 없는 미완의 사랑임을 상징하고, 이는 미완의 나를 고백하는 것과 같다. 나는 붉은색 분말과 검정색 분말을 불규칙적으로 으깨고 섞어 소량의 아교액과 배합해 그림을 그린다. ‘선’이라는 명료한 구분의 장치를 쓰지 않고, ‘입자’로서 살아 움직이는 감정을 종이라는 피부에 묻혀내려는 의도에서다.

 


■ 작가는 현대사회를 디지털식민지로 지칭한다. 이러한 시대에 수묵이 지닌 가치와 의미는

  방대하고 일방적인 정보의 공급은 사유의 힘을 끝없이 약화시키고 있다. 가면 쓴 발언권을 획득했으나 집단작용 속에서 온전한 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그림이나 책은 작화자의 내면을 공유하며 보는 이의 주체를 자각게 한다. 특히 수묵은 몸으로 구현되는 목소리와 언어로의 가치를 지니고, 자기감정을 가장 예민하게 토로할 수 있게 한다. 유화와 조각과 사진에 각기 다른 재료적 특수함이 존재하듯, 수묵도 이미지에 더해 감정을 쓰는 방식이 운필로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수묵이 그 재료적 특성으로 신화적 의미가 부여되고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받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수묵이 문명세계에서 가치체계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지 예술로서 작동하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리 정보람 편집위원 | boram2009@cau.ac.kr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 이호억 개인전>
■ 일 시 | 6.4(화)-7.5(금), 매주 월 휴관 
■ 장 소 | 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 작가와의 대화 | 6.21(금) 15시
1부 - 발표
        중앙유라시아미술사에서 울지을승의 요철법_주수완 (고려대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왜 한국화에 주목하는가_김유연 (뉴욕 독립 큐레이터) 
2부 - 패널 토의 (이호억의 작품을 중심으로)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역임, 실크로드미술 전문가)
       주수완 (고려대학교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김유연 (뉴욕 독립 큐레이터)
       이호억 (전시 작가)
       김영종 (기획, 비평문 작성)
3부 - 청중과의 질의응답

■ 문 의 | 갤러리 전시팀 02-730-5514



 
 


 

나는 주로 제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평화로운 어느 봄날, 사계절 출판사대표이자 복합문화 공간 에무의 관장인 김영종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는 말씀이었다. 내가 펼치고 있는 일명 사생수묵(死生水墨) 작업의 핵심은 관념과 인식의 차원을 넘어 자연 속에서 몸으로 발견하는 내면의 얼굴이었다. 

나는 사람만나는 것을 애써 즐기지 않았고, 조용히 작업을 해오던 터라 모처럼 관장님의 제안과 말씀이 궁금하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관장님과 만나 식사를 하고 내 그간의 작업을 보여드렸다. 제주로 회귀 후 긴 통화와 늦은 밤까지 메신저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일개 화가일 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의심하던 한국화의 역사적 책무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의 소환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선생께서 언급하셨던 7세기 당나라화가 울지을승(尉遲乙僧)을 알지 못했으며 그가 사용하는 요철기법도 들은 바 없다. 마음이 아팠다. 내 작품을 지켜보고 새로운 면을 발견해주신 관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무언가 상실했던 것.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와 마주하여 마치 이산의 아픔 끝에 포기와 자립을 택했던 나를 두들기는 수수께끼 같은 감정에 울렁임을 진정해야 했다. 

 ‘尉遲乙僧.’ 지필묵을 들어 그의 이름을 수차례 써내려갔다. 김영종 관장님은 <실크로드미술>의 저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역임한 권영필 교수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대 주수완 교수와의 만남과 대담을 주선코자 하셨다. 그분들과 내 작품에 대하여 이미 얘기를 나누었다는 말씀도 뒤따랐다. 제주 동쪽 끝 섬마을에 머물던 화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만남과 대담이, 그리고 이 전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유의미한 움직임으로 남아야 했다. 대담에는 뉴욕에서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 김유연 선생도 참여하시기로 했다. 극적인 소식이다. 이역만리 미국에서 이 전시와 대담을 위해 귀국을 결정하셨음에 숙연했다. 

이번 전시와 대담의 큰 주제인 “이호억 작가의 한국화 작품을 컨템포러리 아트에서는 어떻게 평가 또는 해석이 되는가?”이다. 이에 따라 1부에서는 주수완 교수가 <중앙 유라시아 미술사에서의 울지울승의 요철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예정이고, 김유연 큐레이터가 <왜 한국화에 주목하는가>로 강연을 진행한다. 2부 패널 토의에서는 권영필 교수, 주수완 교수, 김영종 관장, 그리고 김유연 큐레이터가 다시 한 번 “이호억 작가의 한국화 작품을 현대미술에서는 어떻게 평가 또는 해석이 되는가?”를 주제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한다. 

 ‘울지을승’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반도의 한 화가와 어떤 연이 닿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 김영종 관장의 비평을 빌어 이 전시를 소개한다.

 

김요종 '에무' 관장의 평

 

[붉은 얼굴]은 ‘뿌리’를 그린 그림이다. 요철의 필선으로 그려진 ‘뿌리’는 작가에게는 미완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욕망과 요철의 필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잠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요철법의 화가로는 7세기 서역 사람 울지을승을 꼽는다. 그래서 요철법을 서역화풍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들어와 일세를 풍미하고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이다. 그는 불화를 그렸는데, 주인공뿐 아니라 화면 전체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 특징이다. 

울지을승의 요철법은 간다라미술의 자장 안에서 태어났는데, 불상 중 유일무이하게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있는 [석가모니 고행상]이 원류일 것이다. 문헌에는 울지의 요철화법이 ‘굴철반사’(屈鐵盤絲)를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마치 ‘철사를 구부려놓은’(굴철) 것 같고, ‘실이 말려 있는’(반사)듯하다는 것이다. 

아주 쉽게 ‘굴철’의 필선을 알 수 있다. 반 고흐 작품 [별이 빛나는 밤], [의사 가쉐의 정원] 등을 보면 된다. 철사를 감아놓은 것 같은, 나무와 산과 집과 그리고 별들이 있는 정경. 

이 고흐 그림은 요철법 중 ‘굴철’이 사용됐다. ‘별이 빛나는 밤’이 어떻게 우리의 망막을 두드리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다. 왜일까? 보지 못하는 우리 능력 너머의 진짜 자연에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고흐의 손에서 흘러나온 굴철의 필선을 통해 넘실대는 우주 에너지를 만나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의 욕망과 요철법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호억은 요철법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가 자기 필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직접 들어보자. 

“나는 입자로 이루어진 분말가루를 으깨고 섞어서 아교액과 배합해 그린다. 선이라는 명료한 구분의 장치가 아닌 입자로써 살아서 움직이는 감정을 묻혀내려는 의도 탓이다.”(작가노트)

바로 이 필선이 요철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식에 구애 받지 않고) 그만큼 몸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반증이다. 이 작가의 정념은 명료한 구분을 가져오는 선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가루가 묻어나는, 캔버스가 아닌 종이 위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감정’을 표현하려는 작가다. 굴철이 주도하고 반사로 채워나가는 붓질에서 ‘생명의 음양 관계’를 보인다.

이호억이 제주도로 가서 ‘위리안치’로 감정이입한 추사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그 유배지를 절실한 마음으로 배회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붉은 얼굴’ 필선을 보면 추사의 [세한도]가 떠오른다. 허나,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성질이 달라서 분별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 

위상수학에서는 구멍이 하나 난 도너츠는 같은 제과 종류인 찐빵과는 위상이 다른 반면, 도자기류인 손잡이 달린 컵과 위상이 같다. ‘붉은 얼굴’은 ‘세한도’와 같은 통속으로 눈에 들어오지만, 처한 처지도, 분노의 성질도, 추구하는 세계도, 표현기법도 전연 다르다. 추사 그림은 그 절창의 수준과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땅 속 뿌리의 욕망보다는, 보이는 세계의 성쇠가 우리를 압도한다. 니체를 빌리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인 차이다.

울지을승의 요철법은 고려불화에도 이어졌는데, ‘필의가 흐르는 듯하고 무척 섬려하다’고 원나라 탕후의 <화감>에도 나와 있다. 이로 볼 때 요철법은 불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필법이 아닌가 한다.  

이호억은 불성이라는 북극성을 발견하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태평양을 바라다보는 제주도에서 작업하고 있다. 바위를 움켜쥔 뿌리의 구애가 ‘오래된 미래’의 요철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한편으로, 작가는 더 벼린 비수를 품고 항해선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출처: https://nmn.ff.or.kr/23/?idx=1930821&bmode=view




 





 

지난달 21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김영종 관장의 사회로 세 시간 동안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복합문화공간 “에무”는 조선의 궁궐 회상전이 있던 곳이다. 회상전은 영조가 잉태된 곳이다. 이곳에 세계적인 실크로드미술의 권위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와 고려대학교 주수완 교수 그리고 뉴욕 독립큐레이터 김유연 선생님이 모였다. 작가의 은사인 중앙대 김선두 교수와 중앙대 철학과 유권종 교수도 자리했으며, 고향에서 큰 걸음 해주신 놀뫼신문 이진영 기자님도 볼 수 있었다. 미술계의 원로이신 성완경 선생님을 비롯하여 선후배, 제자들이 모여 작가의 작품을 주제로 과거와 오늘과 미래를 아우르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요철법과 굴철반사

작가의 작업이 시공을 초월하여 실크로드미술과 7세기 당나라 화가 울지을승의 작품과 유사 지점이 발견되어 소개되고 논의되었으며, 그 논의 중 하나는 요철법과 굴철반사다. 요철법은 자연에서 드러나는 음영을 잡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태어나며 굴철반사는 누에의 실처럼 일정한 선을 굴절시키고 철사처럼 단단하게 사용하는 기법을 뜻한다. 울지을승의 요철법과 굴철반사의 유사외형은 고호와 같은 자연을 탐구하는 화가의 작품에도 특징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화가는 외로운 존재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고독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작가가 기어이 고독의 바다로 침전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만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진실의 눈을 뜰 수 있는 탓이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내가 믿는 진실과 아집에 저항하고 의심하고 투쟁함으로 가능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껍질과 집단이 아닌, 이분법의 악령이 아닌, 홀로 마주하는 나와의 대면. 그리고 이어지는 삶에 대한 물음이 예술이 예술일 수 있게 한다.

 

 
(우로부터_김영종관장, 이호억작가, 주수완교수, 김유연큐레이터, 권영필교수)질의응답